(스압) 북한으로 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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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원사진 여자라서햄볶아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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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해방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해방 이후 한국에는 두 세력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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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과 웅기에 상륙하여 한반도로 진주했던 소련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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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을 통해 진주했던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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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내에 들어온 미군과 소련은 각각 군정을 실시했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여러 협의를 거쳤으나

안타깝게도 남북으로 분단되는 것을 막지는 못하고

대충 여러 일들(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오보사건..등등)로 인해 분단을 더 부채질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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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정국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그리고 한국 전쟁중에 납북되어 끌려갔던 인물들이 많았는데,

이 글에서는 북으로 갔던 사람들의 행적과 말년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1.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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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이라고 불리우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원봉.

당연히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으니,

그가 왜 북한으로 넘어갔고, 또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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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빨갱이지? 조사 좀 받자.

희대의 악질 친일파 경찰이자,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고문기술자, 노덕술.

노덕술은 김원봉을 잡아다가, 조사하였으나

(일설에는 노덕술이 김원봉의 뺨을 때리고, 고문을 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희박하다보니 이 부분은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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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무코하다. 팔리팔리 풀어줘라."

미군정은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해 김원봉을 풀어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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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김원봉은 본인이 체포되었다는 것,

그리고 빨갱이라는 모욕까지 당했기에 억울했고,

사흘 밤낮을 울다가 결국 1948년,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본인은 내려가지 않고, 북한에 남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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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초대 내각 구성원 사진. 2번째 줄 왼쪽에서 두번째, 선글라스 쓴 사람이 김원봉.

김원봉은 결국 북한으로 넘어가 국가검열상이라는 장관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자신의 첩보활동(의열단) 능력을 살려

해방 정국, 그리고 한국 전쟁 당시

대남공작활동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북한에서 잘 사나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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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파벌을 제외한 다른 파벌들을 하나하나 숙청해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김원봉이었다.

김일성은 김원봉의 의열단 조직능력이나, 해방 이후~한국전쟁 당시

그가 보여주었던 조직 관리 능력을 당연히 눈엣가시로 여겼을 것이고,

다른 파벌들이 김일성을 공격한 사건인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삼아

김원봉을 숙청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김원봉은 쥐도새도 모르게 숙청된 것이다.













2. 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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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손꼽히는 무용가, 최승희.

사실 최승희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별 생각도 없었고,

김일성에 대해서도 당연히 별 생각은 없었다.

그랬던 최승희는 왜 북으로 건너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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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일본군 위문공연을 하기 전 최승희의 모습.

최승희는 일제시대에 일본군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최승희가 친일파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최승희에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최승희는 고집이 세고,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최승희를 반민특위에 세워라!'와 비스무리한 비난을 듣게되면

당연히 그의 입장에서는 개빡칠 수 밖에 없는 노릇.

"니들이 뭔데 감히 세계적인 나를 욕해?"

라는 생각이라도 한 것일까, 결국 최승희는 빡쳐서 자신의 남편이 있는 북으로 넘어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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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최승희에게 내어준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

일제시대에는 동일관이라는 건물로 사용되었고,

지금 이 무용연구소 자리에는 유명한 평양냉면집인 옥류관이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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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최승희가 월북하자, 그를 반겨주었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자기 나라로 오겠다는데,

얼마나 반갑겠는가. 이용가치가 매우 높은 사람이었을테니까.

김일성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만드는데 도움을 줬고,

한국전쟁 이후에도 무용예술을 할 수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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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소예술단 자격으로 식사자리에 참여한 최승희. 가운데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최승희,

그리고 우측에 있는 인물이 당시 문화선전상 허정숙이다.

그렇게 꽃길만 걸을 줄 알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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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와 그의 남편 안막, 그리고 딸 안성희.

안막이 8월 종파사건에서 '반당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하자,

당연히 최승희에 대해서도 비판이 들어올 수 밖에 없다.

사실 위에 짤막하게 언급한 최승희의 성격도 한 몫 했는데,

최승희에 대한 연구로 유명했던 정병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최승희는 수시로

"내가 세계적인 예술가인데"나

“내가 이런 사람인데 네가 무엇이길래 이러느냐”

와 같은 "마 임마 내가 누군지 알아 임마?"에 준하는 말을 자주 하기도 했고,

이런 드센 성격으로 인해서, 똑같이 드센 문화선전상 허정숙과도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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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문화선전상 허정숙.

한국으로 따지면 문체부 장관에 준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본인도 연안파에 속했던지라, 김일성에게 숙청당할 뻔 하나

충성맹세를 한 덕에 살아남았다.

허정숙은 자신이 살아남자마자 최승희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입지를 건재하게 지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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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쓴 조선민족무용기본.

한국에서는 1991년에 출판되었다.


더욱이 최승희가 조선민족무용기본을 쓰면서,

김일성에 대한 감사나 찬양의 문구를 넣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최승희와 그의 남편인 안막의 집에서 수많은 귀금속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들어

최승희를 스파이 혐의로 몰아 숙청시켜버린다.








3.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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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고향", "국수"로 유명한 시인 백석.


백석은 조만식 선생의 러시아어 통역을 위해 북한으로 올라갔는데,

그 이후로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내려오지 않은 채 계속 북한에서 살았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싶었던 문화 예술을 하다가,

북한에서 '붉은 편지 사건'이라는 희대의 문화 탄압정책이 일어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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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전후복구를 촉진하자며 일어난 운동인

천리마 운동이 일어나던 도중, 

백석은 전후복구 과정도 중요하지만, 문학을 복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쳐

북한 정부로부터 '당성이 부족하다'라는 비난을 받고,

모든 창작활동을 금지하고, 삼수군으로 보내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삼수군은, 김소월 작가가 언급했던 '가면 돌아오지 못 하는 삼수갑산'에 해당하는 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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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찍힌 백석의 공민증 사진과 가족사진. 삼수갑산에서 고생한 탓인지, 많이 초췌해보인다.

그렇게 숙청당하고 사라진 줄 알았으나, 최근 백석이 살아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의 사진, 그리고 몇 편의 시가 알려졌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해보겠다.


축복


백석

이 먼 타관에 온 낯설은 손을

이른 새벽부터 집으로 청하는 이웃 있도다.


어린것의 첫생일이니

어린 것 위해 축복 베풀려는 이웃 있도다.


이깔나무 대들보 굵기도 한 집엔

정주에, 큰방에, 아이 어른-이웃들이 그득히들 모였는데,

주인은 감자 국수 눌러, 토장국에 말고

콩나물 갓김치를 얹어 대접을 한다.


내 들으니 이 집 주인은 고아로 자라난 사람,

이 집 안주인 또한 고아로 자라난 사람.

오직 당과 조국의 품안에서

당과 조국을 어버이로 하고 자라난 사람들.


그들의 목숨도 사랑도 그리고 생활도

당과 조국에서 받은 것이어라.

그리고 그들의 귀한 한 점 혈육도

당과 조국에서 받은 것이어라.

이 아침, 감자국수를 누르고, 콩나물 데워

이웃 사람들을 대접하는 이 집 주인들의 마음에,

이 아침 콩나물을 놓은 감자국수를 마주하여

이 집 주인들의 대접을 받는 이웃 사람들의  마음에

가득히 차오르는 것은 어린아이에 대한 간절한 축복

그리고 당과 조국의 은혜에 대한 한량 없는 감사.


나도 이 아침 축복 받는 어린 것을 바라보며,

당과 조국의 은혜속에 태여난 이 어린 생명이

당과 조국의 은혜 속에 길고 탈 없는

한평생을 누리기와,

그 한평생이 당과 조국을 기쁘게 하는

한평생이 되기를 비노라.



아무리 북한에서 백석을 '붉은 작가'로 만들려고 애를 써도

역시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시골적 향취는 지울 수 없는 것 같다.

백석은 결국, 1996년이 되어서야

다사다난하고 복잡괴기한 세상으로부터 작별을 맞이한다.



4.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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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인으로 기소된 몇 안되는 조선인이자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

박열은 사실 한국전쟁 초기까지는 계속 서울에 있었는데,

북한군이 내려옴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립투사가 도망갈 수는 없다'고 하며 거절했다.

당연히 서울에 잔류했던 박열은 납북을 당했는데,

북한으로 끌려간 박열은 지속적으로 회유와 협박을 당해서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총련계 간부들이 그를 대일선전에 이용하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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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변에서 풍경을 보는 박열, 1968년

한편 박열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했는데,

당시 북한에 있던 친일파들이 박열을 낮잡아보자

박열이 빡쳐서 이 친일파들을 후드려팼다는 말이 있다.

"(중략) 송효성, 김효석, 김칠성등이 술에 취해 주정을 하기 시작하자

보다못한 박열이 "무엇이 좋아 야단들인가?"라고 소리치자,

송호성은 키가 작은 박열에게

"너같은 조막동이는 주객의 기분을 모른단말이야."

하는 바람에 두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여기에 또 김칠성까지 뛰어들어,

"저 사람은 무정부주의자기때문에 우리와는 성격이 틀린다!"라고 말하여

화가 난 박열은

"이 친일파놈들이 무슨 큰 소리냐!" 하고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이 통에 김칠성은 박열에게 물려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간신히 인솔책임자가 말려 집으로들 돌아갔다.

동아일보, 1962년 4월 21일 연재 '죽음의 세월' 22 중

박열의 이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서 과거 친일파 경력이 있던 인물들과 마찰이 잦았고,

아무래도 그 탓일까. 박열은 소리소문없이 살다가 1974년 세상을 떠났다.




이 쯤 되면 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뭐 할 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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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ㅈㅅ...ㅋㅋ!!!"


천하의 개 씨발새끼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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